September 22, 2006
숨은 요새의 세 악인 隱し砦の三惡人 Hidden Fortress (1958)
黒澤明 kurosawa Akira 의 1958년 작품.
거장이라 불리우는 감독들 중 재미로만 본다면 가장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내러티브와 구성의 꽉 짜여진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보기 전 스타워즈의 원형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소개를 읽었다.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마타시치, 타헤이는 고향 마을을 떠나 전장의 시체를 털어 돈을 벌려고 하지만
죽도록 고생만 한채 돌아가는 중이다. 티격태격 자기 몫만 챙기는 모습이다.
그들은 우연히 장작 속의 황금을 발견하고
자칭 마카베 로쿠료타라는 불한당과 함께 황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꾸민다.
마카베는 유키공주를 모시는 가신으로써 그녀를 도와 가문을 재건할 임무를 가진다.
숨겨진 요새에서 준비를 마친 후,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게 된다.
유키는 성안에서의 삶, 망해버린 가문의 재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민들의 실상을 보면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군주로서의
자질을 닦아나간다.
그들은 적들에게 잡히지만 마카베의 호적수인 타도코로 료헤이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마타시치, 타헤이는 얼떨결에 그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마지막에야 알게 되고 결국 한장의 금판만을 가진 채 서로 양보하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결국 내용은 두 바보의 티격태격 좌충우돌 모험기에 망가의 가신과 공주의
모험담이 곁들여 지는 것이다. 물론 비중은 망가의 탈출에 더 있다.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두 바보의 이야기는 결국 덧 없음을 보여준다.
지배자들의 흥망성쇠와 관계 없이 민중들의 삶은 더욱 힘들기만 하다는 것 아닐까?
결국 이들은 죽도록 고생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 채 말이다.
위의 느낌과 별도로 재미만 따져도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여 볼만하다.
또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대비하여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결국 떠올린 캐릭터는 레아, 오비완, 다스베이더였다.
루커와 솔로의 역할을 해야 할 두 사람은 너무 어글리 했으니 말이다.
August 14, 2006
影武者Kagemusha 1980
影武者그림자 무사로 번역될 수 있는 아키라의 칸느 그랑프리 수상작
엄청난 규모를 보여주는 것 같다. 제작이 코폴라와 루카스이기도 하니까 뭐.
일본의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각각의 그림자 무사를 가지고 있다.
신겐, 노부나가, 이에야스로 삼분되어 있는 듯한 양상의 전국시대에 신겐은 더욱 카리스마 있는 위치에 있는 듯 하다.
신겐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도둑을 그림자무사로서 훈련을 시키게 되고,
신겐의 죽음이후 그 유언과 제장들의 의도로 도둑은 그림자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다.
그림자무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의 정체성의 혼란, 신겐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를 위해 피흘리는 여러사람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해가게된다. 하지만 그 역할은 3년의 기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 말살과 타 존재로서의 위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없게 됨으로서 그에게 남은 것은 만들어진 자아로써만 기능하게 되고, 그 존재의 완벽한 연기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위치에서 쫓겨나고서도 계속되어진 집착은 영화의 끝까지 계속된다.
그림자 무사의 존재가치는 군주가 존재할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 무사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화에서의 그림자 무사는 개인적인 혼란과 갈등은 무시되어지고 철저한 전쟁터 및 전국시대의 균형을 맞추는 추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그것은 원군주의 존재감의 비중도 있겠지만, 그에 더하여 숭배 및 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적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마치 종교의 교주나, 신의 위치에 있는 것 처럼, 그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과 후의 전쟁은 피아에 미치는 작용이 백팔십도 틀리게 전개된다.
신겐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치를 더해주는 지주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한 진실은 위정자들이 더욱 잘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한 것이 신겐과 그의 장수들이다.
낙마로 인한 어이없는 진실의 발각은 그림자 무사에게는 스스로의 존재 말살이며, 그의 군단에 있어서는 엄청난 박탈감과 근본제도의 붕괴이다.
아마도 어떠한 제도나 체제 내에서 아주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지켜져야할 원칙이 흔들린다면 그 시스템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카게무샤와 같은 눈속임으로는 진실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절대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었일까?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가치들은 무었일까?
거기에 대해 고민해 본다. 그림자로써 결코 대치될 수 없는 원칙과 제도들이 우리에게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림자 무사는 현실에도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그것이 진짜인양 우리를 착각케 하고, 그 자신도 진짜인 줄 아는 것들.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The Seven Samurai 七人の侍 Shichinin no samurai, 1954
아키라의 작품 중 아마도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원작을 보지 못했던 나도 말은 참 많이 들었으니 말이다.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민중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한다.
배고픈 사무라이 즉 로닌(낭인-주인이 없는 사무라이를 낭인이라고 한다더라)을 고용하여 산적들에게서 스스로를 구하려고 한다.
사무라이란 전혀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계급상만 높은 묘한 위치의 인간들이다.
쓸데없는 자부심만 강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양반이란 위치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벌레도 못한 농민들에게 고용된다는 것은 계급과 계층의 역전 및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렵게 구한 칠인의 사무라이는 당연히 특이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다.
여기서 키쿠치요(미후네 토시로)의 경우에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며, 사무라이를 꿈꾼다). 마을 사람들과 사무라이의 중간에 걸쳐 있다.
사무라이들은 이들을 훈련시키고 마을을 요새화하여 산적들의 습격에 대비한다.
각각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이들은 싸움을 겪으면서 농민과 사무라이는 일체감을 느낀다.
농민들이 숨겨놓은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많은 희생 후 남은 것은 메워질 수 없는 농민과 사무라이의 간극이다.
산적들을 물리친 후 남은 것은 결국 새로운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농민들 만의 축제이다.
그 축제 속에 사무라이는 절대 끼어들수 없다. 농민도 알고 사무라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남은 것은 네개의 큰 무덤 뿐.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민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이 숨겨둔 무기를 꺼낼 때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사무라이를 이미 죽인적이 있다.
사람이 잔인해지고 거칠어질때는 보통 혼자일때 보다는 단체일 때 그러한 성격이 강해지는 것 같다.
혼자서는 할수 없는 일을 여럿이는 쉽게 해버리기도 하고 저질러버린다.
물론 좋은 경우일 때도 있지만 잘못 된 방향으로 발산될때는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리라.
인간의 이중성이란 것은 어디에서도 드러난다.
한가지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복잡한 이중성, 계급의 역전 등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 그리고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August 10, 2006
라쇼몬 Rashomon 羅生門 1950
위키피디아의 라쇼몬
Kurosawa Akira
아키라의 작품은 이걸 두번째로 본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의 내가 아는 거장들은 참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아키라, 쇼헤이, 야스지로 몇작품 접해보지도 않은 채 이런 말 하는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처음 접한 아키라는 그 명성에 비해 많은 것을 느끼진 못했었다. 물론 재미있었고 좋은 작품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거장이라 이름 붙을 수 있는 감독들은 한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한작품 씩 이렇게 접할때마다 느끼는 것 같다. 쇼헤이가 그랬고, 아키라가 그렇다.
라쇼몬, 사무라이 영화인 것 같다는 느낌만 받고 보게 되었다. 구로자와 작품을 보지도 않은 채 그냥 사무라이 전문, 사극 전문의 대규모 영화전문일꺼란 잘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언급한 위 감독들 중 아마 가장 대중과 호흡하기 편한 스타일일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사무라이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임과 동시에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역사왜곡에 대한 의문을 강력히 표현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어진다.
인간본성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살인사건이 있으며, 그 살인 사건을 이야기 하는 세사람이 있고, 당사자 세명이 있다.
비겁하지만 일반적인 소시민,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믿음속의 갈등, 원초적 이기심의 당위성.
복잡하긴 하지만 위와 같은 입장을 가진 세사람의 대화를 통하여 다 무너져가는 라생문(羅生門) 밑에서
비를 피하며 사건의 실체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강도, 아내, 남편 이 세명의 진술을 통하여 살인사건의 의혹은 풀어지기도 하고 증폭되기도 한다.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른 자기 변명은 생사를 불문하고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들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단 한가지의 진실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왜곡 각색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입을 통하여 사실로 포장되어진다. 결국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왜 관청에서 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증인과 피고들의 모습만 보여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일까?
일단은 관리가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는 바로 우리 관객이며 그들의 죄와 벌을 이끌어 낼수 있는것도 관객이기에, 판관의 모습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관객에게 구로자와가 묻고 있는 방식으로 보인다. 한가지 진실 세가지 왜곡 그리고 객관적 사실 하나로 나타나는 이 사건은 인간의 추함과 비겁함에 대한 고백이며 자아비판이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고 모두들 각자의 변명을 항상 가지고 있는 추악함이라고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대도 어떤 절대적 사실 앞에서는 흔들릴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기의 옷과 장신구 마저 강탈해가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절망을 암시한다. 물론 그 아기는 회개와 반성 그리고 믿음의 회복등이 가능한 기호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라생문이란 상징적인 제목에서의 아기의 울음 소리는 아키라의 절망속에서도 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이런 희망이 있으니 살만하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것이 있어야 희망도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살려주세요, 같이 살아갑시다. 우리 살아있다니까? 그런 말로 믿고 싶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 역시 위에 언급한, 사실 하나 변명 셋 입장 셋 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사실로 믿는 것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닌 이상 간접적이고 가공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가공이 아닌 주관적 가공을 거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에게 전승되는 것들이 역사이며 전통이다. 이 영화에서와 같다. 과연 어떤 말을 믿을 것인가? 나중에 나뭇꾼이 말한 진실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고 있으며,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우리가 판관의 입장에 있다면 나뭇꾼의 이기적인 생각의 진술 밖에 들을 수 없으며 세개의 변명들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실에 대한 가공(왜곡)과 어떤 선택들의 만남이며 집합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1950년이면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의 힘든 시기이며, 한국전의 특수를 누리기 전후일것이다. 또 패전이라는 굴레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당위성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 시기에 이러한 살인사건에 기초한 인간 본성의 변명들을 기술한 것은 일본의 당시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전후 처리 절차나 입장에 대한 엄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영화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도가 나무를 헤쳐가면서 뛰어가는 장면들은 마치 왕가위를 보는 것 같았으며, 남펴이 죽는 같은 장소에서의 상황만 조금씩 가공되어진 같은 장면들은 변명에 의한 상황의 비틀림을 인물의 배치, 보는 위치등이 적절하게 바뀌면서 그 긴장감, 궁금함을 계속 유지 심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라쇼몬에서의 강상황과 대사들은 정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볼때는 이거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가 결말으로 가면서 그 모든 것들이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의문이 다 풀려버리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 연기, 상황, 배경, 대사 그 모든 것들이 끝으로 가면서 완벽해져 버린다고나 할까 뭐 그렇다는 말이다.
잘 모르는 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이제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난 이런 결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바랬떤 결말은 나뭇꾼 또한 아기에게서 뭔가를 취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이 너무 삭막한거 아냐? 라고 물으면 – 나 삭막해 라고 대답하련다.
이왕 희망을 주려고 했으면
스님이 아기를 데려가면서 그래도 살아야지.
이제 너에게 희망을 어쩌는 식으로를 바랫다는 말이다.^^
아키라는 정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믿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 애정을 얼핏 느꼈지만, 아키라는 내가 본 두개의 영화에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가치를, 인간이라는 존재를 삶속에서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믿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쳇 두편 보고 많이도 아는 척 하는 것 같아 좀 쪽 팔린다. 그런거야 앞으로 좀 더 보고 생각하면 될일이고. 이만 마무리 지을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내가 본 두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결코 지루하지 않으며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백한 의도를 통해서 관객을 몰입시키기도 하고, 그 간격을 벌리기도 하는 등 정말 연출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련가??
August 8, 2006
천국과 지옥 天國と地獄 / Heaven and Hell (1963)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 불리우는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뭐 연출력을 보여준 거라고 한다)
굉장히 짜증나는 진행 구조를 가지고 있다.
냉정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곤도가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하는 이유를 일단 이해못하겠다.
전반부의 유괴와 관련하여 아이를 구하기까지의 스토리와 후반부 범인을 잡기 위한 경찰의 노력이라는 두부분으로 영화는 극명하게 나누어진다. 혼자 이렇게 상상도 했었다. 이건 곤도의 자작극일거야. 스토리도 그렇게 흘러가잖아. 곤도와 다케우치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확신까지 했었는데 아니었다. 다케우치가 곤도의 집을 바라보면서 생기게 된 이유없는 증오가 원인이었으며 곤도는 끝까지 착한 역으로만 나온다. 젠장. 이건 아니잖아. 너무 뻔해서 추리하는 재미가 없잖아. 뭐 곤도가 범인이었다고 해도 아마 똑 같은 말은 했겠지만.
다케우치 역을 맡은 배우의 젊은 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담포포와 Go 그리고 일련의 일본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거나 노인의 역할이었는데 젊은 그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아키라의 연출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훌륭한 영화일런지도 모르겟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영화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연결될 뿐 전혀 다른 영화이다.
전반부가 곤도가 겪는 자신의 이익과 양심이라는 부분에 갈등을 맞춘 데 비해서
후반부는 그 심리적인 갈등 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수사물인 요즘의 CSI에 가깝게 보인다.
중반부에 이미 범인을 노출시킨 것은 오히려 진짜 범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반부의 그 탁월했던 심리 연출에 비해 후반부는 심리보다는 사회적인 여론과 개인의 이익 또는 증오의 대결구도로 이끌어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승리한 건 증오, 여론, 이익, 양심 그 어떤 것도 승리하지 못하는결과를 보이고 있다.
천국과 지옥 high and low로 상징되어지는 빈부격차에서의 박탈감은 증오로 이어지고 그것의 실행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곤도와 다케우치의 면회장면에서의 대화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사형을 당한 진정한 이유는 그의 죄때문일까? 그의 가난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회의 결정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지옥에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곤도도 초반부 부인에게 하는 말로 봐서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부의 중요성을 알면 상실이 될때는 지옥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다케우치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결국은 좋은신을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바램을 성취해나간다. 그의 선택이 그를 진짜 천국으로 이끈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다케우치는 그런 천국을 파괴하고 행복한 사람의 파국을 보기를 원한다. 그는 선택을 잘 못 함으로써 자신만의 지옥이 아니라 진정한 지옥으로 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콘도가 행복한지는 모르겠다.다케우치가 불행한지도 모르겠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에 있어서 만족을 얼마나 하는 것, 힘들다면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을 보면 두개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둘다 재미있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 매력적이지만, 완전 중심축이 바뀌는 탓으로 두번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를 거의 처음 본 셈인데 근래 본 세명의 일본의 거장들은 각각 너무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엔 미조구치 겐지를 한번 접해봐야겟다.
착하게 살자. 그런 말 하고 싶지는 않다. 착하게 살면 힘들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너무 착할뿐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은 곤도의 비서격이었던 사람의 처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