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1, 2006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 1979) Fukusho Suruwa Ware Ni Ari

Posted in Cinema tagged , , at 3:45 pm by kanerho

Imamura Shohei
금기시 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영화.

에노키즈의 살인행각을 따라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 부터 유골이 뿌려지기까지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계속 보면서 에노키즈는 왜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일말의 반성도 없는 이유에 대해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드는 생각은 그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전개되어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가 눈여겨 본 인물상은 그 중에 당연히 에노키즈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과 하츠마츠의 모녀이다.
에노키즈의 살인은 어떤 동기도 없으며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유없는 것이다.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당당하기만 하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카톨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핍박받는 종교인으로서 그들이 애정을 가지는 대상은 허울뿐인 하느님과 아버지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이다. 며느리 카즈코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원래의 사랑에 대한 실망과 반발에 기인한 대체적인 느낌을 가진다. 어머니는 더우기 카즈코와 남편을 보면서 소외감과 동시에 애정의 대상인 아들조차 이미 악마일 뿐이다. 이 부분은 아마 노인 문제에 대한 잠시의 언급일 수도 있겠다.

하츠마츠 모녀는 어찌 보면 더욱 복잡할 수도 있겠다. 구석진 작은 여관의 포주인 딸과 살인죄로 1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정사를 훔쳐보는 관음증과 경정의 도박만이 낙인 엄마. 더우기 딸은 어떤 난봉꾼의 첩으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엄마는 그 난봉꾼과의 화합만을 바라는 묘한 캐릭터이다. 그들은 그가 살인자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나름대로 그를 끌어안는다. 에노키츠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정을 느끼게 되면서 혼란스러워 지고 이유없이 그들을 살인하고 그들의 재산을 처분한다. 하츠마츠 모녀는 사랑을 전혀 받지도 못하고 해본 적도 없는 듯이 보인다. 단지 그들은 남성우월적인 사회의 희생자처럼도 보인다. 거기에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엄마, 그리고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까지 당하는 딸.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캐릭터들이다. 이 모녀에게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것은 할머니의 살인이다. 그녕의 살인은 자신의 표현으로는 죽이고 싶어서 죽였고 후련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에노키츠에게 물어본다. 후련했냐고? 속이 풀렸냐고?

에노키츠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여지는 것은 아버지의 배가 캐톨릭의 종교탄압을 통하여 군수물자로 징발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이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그 군국주의의 상징처럼 보이는 하얀제복의 일본군 장교를 덮치지만 아버지는 보기에 비굴하기만 하다. 이 때부터 그의 이유없는 뻔뻔한 당당함은 시작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반항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경멸 그리고 느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애정인 것 같다. 그는 도피 생활전에는 그의 소년원 감옥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 처럼도 보여진다.

에노키츠는 아버지와 아내의 그 묘한 감정을 이미 눈치채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조장까지 한다. 그에게 있어 아내와 자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어머니도 아니며 아버지에 대한 기대와 실망, 증오와 애정의 복합체인 이해하기 힘든 느낌뿐이다. 그는 그것을 다른 곳에 풀어버리려고 하지만 하츠마츠 할매의 대답에 전혀 후련하지 않고 속도 풀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하츠마츠에서 2명을 죽인 이야기는 여러번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도저히 알수가 없다고 말하는 형사의 대답에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솔직히 난 대화가 가장 이해가 안 갔다. 내 보기에 다른 모든 살인은 그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는 무차별 살인일뿐이었다. 하지만 하츠마츠 모녀는 그에게 진정한 가족애를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할매는 그에게 쓴소리를 막 하지만 아마도 그것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가 없는 애정에 불만을 느낀 그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모성으로서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기를 가지고 싶어하는 딸은 그에게 아내에게서 느끼지 못한 사랑을 느끼고 뱃속에 있을 것 같은 아기에 대한 부정조차도 그에게 주었을 것 같다. 그렇다 이것은 그에게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애정넘치는 조합에는 아버지가 없다. 바로 그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뒤에 표현되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살의는 그가 유일하게 가진 진짜 살의이다. 그래서 하츠마츠에서 그는 3인을 죽였다고 표현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줄거리에 대한 짐작과 유추는 대충 이정도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많은 부분이 빠졌고 내가 놓친 부분도 있겠지만.

위에서 내러티브와 관계된 나의 의문과 생각, 추측등을 주절거렸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다는 아니다.
내가 가장 먼저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금기의 총집합이다.(물론 일본이라는 나라라 강조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먼저 근친상간의 표현, 그것도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어찌보면 전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가장 금기시 되어질 그 관계에 대한 파괴이다. 물론 직접적인 것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여하튼 사랑하고 있다.

에노키츠의 트라우마일 제복장교의 천황폐하를 위하여 배를 바치겠다는 식의 표현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가장 강도 깊은 비난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천황을 그러한 상황에서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있기 어려운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물론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몇번씩 강조 되어지는 폐하를 위하여라는 그 반복의 표현은 결코 찬양이 아닌 비꼼임을 알수 있지 않을까?)

일본 관부의 허술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기본이다. 연쇄 살인범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계속 된 범행에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수 밖에 없는 그 멍청함은 영화 전체에 깔려 있어 언급조차 필요없다.

하츠마츠 모녀와 난봉꾼을 통한 여성에 대한 착취와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에노키츠는 죄의식 없는 살인광에 섹스홀릭이다. 그의 아내는 남편과 시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통하여 성에 무너져버린다. 모녀 역시 관음증을 통한 성의 만족과 종족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에노키츠의 어머니는 성을 상실한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성적인 문제와 살인으로 표현되어지는 폭령성이 전체적으로 도배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서도 에노키츠의 동기와 죄의식의 상실은 얼핏 짐작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의심과 혼란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각해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친구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천재인가? 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군국주의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제도에 대한 일관적인 비판을 언급한 적 또한 있다. 먼저 천재인가?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 그에게서 천재성을 느낀 적은 없다. 이제 몇작품을 본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 수십년의 간극 속에서 지켜지는 큰 줄기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작품에서 조금씩 느껴진다. 시내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여드러나는 것에서 친구가 말한 제도적인 비판을 이제는 느낀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일본에 대한 이마무라의 지극한 사랑에 의한 애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 진정한 일본의 애국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그렇다고 나를 일본 빠돌이로 착각하지는 말도록). 말이 조금 옆으로 흘렀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그만의 일관성은 그를 천재로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천재라기 보다는 인류학 입문에서 인형의 음모를 하나하나 심어가는 그 완벽추구와 철저함이 그에게서 느낀 것이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아마 이마무라 쇼헤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해하라.

이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은 나로 하여금 영상의 재생을 여러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그의 유골을 하나 하나 그리고 몽땅 던지는 화면에서의 프리즈 프레임(? 맞는지는 모르겠다)에서 나는 앞서 언급한 인류학입문의 수상가옥의 부유를 떠올렸다. 그 배는 어디로 갈지를 알수가 없고, 던져진 유골은 멈쳐버린다.
난 솔직히 이 연상에서 친구가 말한 천재인가 하는 말에 순간 긍정해버렸다. 위의 두장면에서 나는 정처없이 부유하는 일본과 우리 인간의 본성을 떠 올려버렸고 슬퍼졌고 반성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번뜩이는 재기의 천재가 아니라 꾸준하지만 엉뚱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천재인 것 같기도 하다. 뭐 그가 천재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그의 영화는 나를 즐겁게 하고 사고를 넓히면서 이런 허접한 감상이라도 길게 적게끔 하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변명, 혹시나 이글을 우연히라도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꼭 알았으면 한다. 내가 여기 블로그에 적는 글은 퇴고 거의 없음, 수정 거의 없음(틀린 사실은 고친다)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글이 거칠고 논리가 떨어지며 논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대한 서글픈 내 부족함에 대한 변명을 이렇게 해본다.

ps 인류학 입문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어느 작품이 더 좋으냐? 아니 맘에 드느냐 묻는다면?
인류학 입문임을 밝힌다. 내가 본 모든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August 12, 2006

우나기 うなぎ Unagi (1997)

Posted in Cinema tagged , , at 12:53 am by kanerho

Imaura Shohei
장어라는 제목을 가진 이마무라 쇼헤이의 두번째 칸느 그랑프리 작품.

본작품이 몇 안되어서 그런지 인류학입문에서의 마지막 장면의 떠내려가는 수상가옥과
이 영화에서의 어딘가를 향해 저어가는 배(아마도 혼례식)의 엔딩은 뭔가 의미심장하다.

1988년 여름 야마시타는 퇴근하는 전철안에서 부인의 불륜에 관한 편지를 받는다.
낚시 도중에 돌아온 야마시타는 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1996년 야마시타는 장어 한마리와 함께 가석방출소를 하게 된다.
보호관찰사인 스님을 통하여 이발소를 열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스님하고만 대화하고 있고 통제된 교도소와 지금의 생활에서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정많은 옆집 목수, UFO를 기다리는 엉뚱한 넘, 참견하기 좋아하는 날라리 등이 주위에 있다.
어느날 자살시도한 여자를 구하게 되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그를 위협하는 감옥동기, 여자를 위협하는 그녀의 애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자의 엄마.

이런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원숙함과 노련함이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금 따뜻해졌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엉뚱함은 여전하긴 하지만.

어항속의 장어,
결국은 풀어주는 주인공,

설명을 참 친절하게도 해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아함도 느꼈다.

영화를 볼 때는 참 생각이 많았는데 막상 보고나니 적을 말이 없다. 쩝.

August 2, 2006

The Pornographers : エロ事師たちより人類学入門1966

Posted in Cinema tagged , , at 11:15 pm by kanerho

http://www.imdb.com/title/tt0060560/
The Pornographer 1966
Jinruigaku Nyumon: Erogotshi yori 1966
Imamura Shohei
Ozawa Shoichi
128min
Japan
B/W

예상외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고도 이런 놀라움은 솔직히 느끼질 못했다. 정말 이 작품이 맘에 든다.
66년에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에로영화 제작자인 오가타는 하루에 두편씩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과부인 하루와 그녀의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있다.
그는 집을 짓고 아이를 가지는 등의 소박한 꿈을 꾸고 있으며 자기가 하는 일이, 인간 특히 남자들의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주는 사회복지와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아이들은 그녀의 와병중 반항이 극에 달하고, 나름대로 오가타는 아버지역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음란물유포 범죄자인 그에게 좋은 시선은 불가능. 하루의 죽음과 인간의 배신들을 겪은 후. 그는 요즘으로 치면 러브달이라고 하나? 인형제작에 착수한다. 그것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그의 집이라고 할수 있는 목조배는 먼 대양으로 떠내려가 버린다.
마지막의 작은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떠드는 말들 – 신선했다.

잉어가 들어있는 어항너머로 보는 장면,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여러가지 전개들.

솔직히 어쩌다가 구한 영화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건 대단한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고의 블랙코미디 중 하나라고 여긴다. 쳇 영자막이라 조금 그렇다. 대사보랴, 화면 보랴 힘들었다. 자막이나 손질해서 한번 더 봐야겠다.- 내용은 한 번 더 보고 보충할 예정.

楢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 1983

Posted in Uncategorized tagged , , at 10:56 pm by kanerho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 1983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생존인가? 사회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생존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짐승과 다른가?

일본중세의 생존이야기.
우리나라의 고려장과 비슷한 70세가 되면 아들이 부모를 나라야마의 신령에게 데려다 주는 의식.
생존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 종족번식의 본능과 음식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면서 생겨난 풍습이리라. 거기에 어떤 관습 또는 믿음으로서의 나라야마 가는 길은 일종의 인신공양이며 그들만의 결코 어길수 없는 최대의 가치일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살인이 정당화되는 시대에 그러한 수고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의식이며 단 하나 지켜야만 하는 유일 가치일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어떻게 보면 슬프지만 떠들석하기도 한 장례식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당시에 70세를 산다는 것은 꽤나 장수일 것이다.
제식으로서, 가치유지의 장치로써 그리고 잔치로써 나라야마 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버지도 살해한 타츠헤이가 어머니를 버리면서도 발길을 되돌리는 그 감정은 어떤 것일까?
결국은 나라야마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눈이 내린다는 것으로 그 의식에 어머니는 좋을꺼야, 운이 좋은거야 하고 위안할 수 밖에.

절벽에서 아버지를 버리는 친구의 모습과 나라야마에 버리고 내려가는 자신에게서 그는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어떤 식으로던 사람은 살아간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하기 위해서 종교, 믿음, 이데올로기, 관습, 법, 제도 등등을 만들고,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방식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인간이다. 그것을 내가 이해를 하던 못하던 말이다.

그렇다면 타츠헤이는 어떤 선택을 한건가?
제도에 순응한건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일까?

타츠헤이의 삶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과 단 한치의 차이도 없다면 단순한 나의 과장일려나?
타츠헤이도 우리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젠장 인류는 석기시대 이후 문명만 발전해 나갈뿐,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멸종직전의 종인가 보다. 뭐 이것 저것 발전했고 지금 저러한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럴까? 하고 되묻고 싶다. 생활이, 제도가, 인간존중이 점점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아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은 발전하고 있는가? 문화, 문명,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의 종 그 자체는 발전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그것이 인간이 우월해지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유일한 이유인데 그것이 정체 되어있다.

진화가 멈춘 종은 반드시 쇠퇴하고 멸종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 또 엉뚱한데로 흘러가는군. 쳇 이건 나의 병인가 보다.

인간은 진화를 게속 해야만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글을 좀 다듬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떠 오르는 데로 적다 보니. 영화감상이 아니라 허튼 소리가 잘 되어버린다. 이 블로그의 영화, 음악에 관한 것들은 결코 비평도 아니며, 분석하기 위한 글들도 아니다. 내가 봤던것, 들었던 것, 느꼈던 것들을 단순히 메모하는 것이다. 절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주지해야겠다. 이건 내 생각의 정리를 위한 낙서장일 뿐이다. 그래서 두서도 없고 개념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정리가 될까 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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